
창세기 3장
생명나무를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신다. 땅(아다마)에서 사람(아담)이 나왔다. 존재의 출처로 돌아가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원래 아담의 정체성은 동산을 지키고 다스리는 자였다. 하나님과 직접 교제했다. 하지만 죄 이후엔 왕이 아닌 노동자가 되었다. 에덴이 아닌 저주받은 땅의 경작자가 되었다. 은혜의 환경이 생존의 환경이 되었다.
하나님은 선언하신다. "너는 흙이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자각하게 한다. 하나님의 생기를 받지 않으면 흙이었음을 뼈저리게 기억하게 하신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이다.
생명나무를 먹지 못하게 막으심은 징벌이 아닌 은혜다. 천사는 타락한 채로 영생한다. 돌이킬 수 없다. 우리가 죄성을 유지한 채로, 하나님과 단절된 채로, 수치와 두려움을 가진 채로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영원한 타락 상태가 고정되지 않겠는가. 회복의 여지 자체가 없지 않겠는가.
"영생할까 하노라" 이 말은 "지금 상태로는 안 된다"에 가깝다. 타락의 영구화를 차단한 조치다. 그렇기에 이 장면은 낙원의 상실이 아닌, 구속사의 시작이라 생각한다. 죽음이 들어왔으나 그 죽음이 새 생명의 가능성을 연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으니까. 그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은 에덴을 삭제하지 않으셨다.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신다. 언젠가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서 생명나무가 다시 등장하지 않는가? 그렇기에 우리는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창세기 6장
하나님의 아들들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난다. 그들은 이제 육신이 되었다. 하나님 의존적 존재에서 자기 본능 중심 존재로 전락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이 떠오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창세기 6장은 영적 존재가 육으로 추락한다. 요한복음 1장은 하나님이 육으로 내려오시고. 히브리어 바사르도 flesh, 헬라어 사르크스도 flesh.
영이 육이 되는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타락과 구속이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육이 되어 망한 그 자리로 하나님이 육이 되어 들어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문장은 창세기 6장의 문제를 정면 돌파하는 사건인 것이다.